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12:5)
똑똑똑/ 땀이 내 이마에서 미끄럼 탄다// 10살 외손자의 ‘땀’이란 동시다. 나는 달을 볼 때/ 내 눈 반짝반짝한다/ 달도 나를 보고 반짝반짝하네// 8살 외손녀의 ‘달’이란 동시다. 손자들에게 일기를 동시로 쓰라고 했더니 나는 내 인생의 겨울에 봄을 추수하는 은혜를 받았다.
가을 들녘에 벼들이 모두 머리를 숙였다. 참으로 아름답다. ①벼들이 익으면 그 결실로 머리를 숙인다. 사람도 완성되면 그 무게로 머리를 숙인다. ②벼들이 익으면 겸손히 머리를 숙인다. 사람도 된사람은 겸손히 머리를 숙인다. ③벼들이 익으면 감사로 머리를 숙인다. 땅과 물과 바람과 해를 주신 하나님께, 수고를 아끼지 않는 농부 주인에게 감사로 고개 들지 못한다. 사람도 되면 하나님께, 사람에게, 모든 자연에게 감사하여 고개 들지 못한다. ④벼들이 익으면 주인이 추수하도록 머리 숙여 봉헌한다. 추수해주지 않는 벼는 논에서 썩고 만다. 사람도 복 받으면 내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봉헌한다. 하늘 곡간에 들어가는 것이 복이기 때문이다.
나는 70년을 향수하시고 소천한 두 의사의 장례를 집례 했다. 한분은 30여 년 전 안산에 와서 산부인과를 운영하던 우리 교인이고, 또 한 분은 20년 전 150여억 원의 사재를 털어 안산에 종합병원을 설립한 외과전문의 원장이다. 두 분 다 폐암으로 투병하시다 하늘의 부름 받았다. 의사 중 가장 위험한 진료과목이 산부인과와 외과라 한다. 고쳐야겠다는 사명감과 고치지 못할 때 오는 스트레스와 환자가족들의 실망감, 어느 경우에는 잘못된 결과의 책임으로 의사가 짊어져야하는 고통이 크다. 나의 처 고모부는 20년 전 모 종합병원에서 위암수술 중 지혈이 안 되는 잘못된 결과로 2차 수술을 받고도 결국 처고모부를 잃은 적이 있다. 의사가 잘못을 인정함에도 처 가족은 병원과 의사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병원에서 장례 치러준 일만 감사로 받았다. “어느 의사가 사람 살리려 수술하지 잘못되게 하기위해 수술하겠는가?” 내가 처가를 설득한 한마디다.
선친의 친구인 김씨 아저씨는 무안군의 유명한 씨름선수시다. 장원하는 날은 장원상으로 황소를 상으로 준다. 씨름이 있는 날은 동네에 큰 잔치가 벌어진다. 어느 소년이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하면 힘센 씨름선수가 될 수 있냐고 그때 아저씨는 우리에게 “황소를 두 손으로 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하루도 쉬지 말고 송아지를 들기 시작하면 그 송아지가 황소가 되어도 들 수 있는 장사가 된단다” 꾸준함의 은총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6:24) 어떤 능력도, 어떤 지혜도, 인내의 노력을 대신할 수는 없다.
6.25때 부모형제를 다 잃고 5살 내 친구는 15살 누나 손잡고 목포로 피난 와서 살았다. 우리가 나이 10살 때 방학 한 달 동안 친구가 됐다. 그 친구 누나가 창녀란 비밀이 알려지자 친구와 누나는 이사를 갔고 나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62년이 지난 금년 추석에는 서럽게 그 친구와 그 누나가 생각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부는 한 몸에 두 영혼이고, 친구는 두 몸에 한 영혼이라 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 했고(사41:8) 주님은 우리보고 주님의 친구라 했다(요15:13)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신부라했다(마25:1)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과 한 몸인 부부관계요, 한 영혼인 친구관계다. 이 얼마나 놀랍고 소중한 임마누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