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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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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룻기는 참 흥미로운 책입니다. 엘리멜렉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고향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이라는 외국으로 이주합니다. 고향에서는 먹고 살 길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택한 길입니다. 이민 생활은 녹록치 않습니다. 남편 엘리멜렉이 죽습니다.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차례대로 숨을 거둡니다. 세 남자가 죽고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 그리고 나오미만 남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합니다. 두 며느리는 모압 사람이니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합니다. 헌데 룻은 한사코 시어머니 나오미와 동행하겠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룻기 1:16, 새번역) 룻의 언어는 참 따뜻합니다.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온 마을이 추수하는 일로 활기가 넘치고 웃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두 여인에게는 예외입니다. 룻이 이삭이라도 줍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 우연히 만난 보아스가 룻에게 말합니다. “여보시오, 새댁,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이삭을 주우려고 다른 밭으로 가지 마시오. 여기를 떠나지 말고, 우리 밭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바싹 따라다니도록 하시오.”(룻기 2:8, 새번역) 보아스의 언어 역시 참 따뜻합니다.
룻과 보아스 사이에 뭔가 미묘한 감정이 싹트는 것을 느꼈을까요? 나오미가 룻에게 말합니다. “얘야, 네가 행복하게 살 만한 안락한 가정을, 내가 찾아보아야 하겠다. 생각하여 보렴. 우리의 친족 가운데에 보아스라는 사람이 있지 아니하냐?”(룻기 3:1-2, 새번역) 며느리 룻이 재혼을 하면 홀로 남겨질 신세이지만, 나오미의 룻을 향한 언어 역시 인자함과 배려가 가득합니다.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누이트(에스키모)들은 분노를 현명하게 다스린다. 아니, 놓아준다. 그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언제까지? 분노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을 때까지. 그리고 충분히 멀리 왔다 싶으면 그 자리에 긴 막대기 하나를 꽂아두고 온다. 미움, 원망, 서러움으로 얽히고 설킨,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힐지도 모르는 지나치게 뜨거운 감정을 그곳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룻기의 배경이 되는 사사 시대와 비슷합니다.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세상입니다. 말이 거칠어지기 쉬운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보아스와 룻 그리고 나오미처럼, 그리고 이누이트들처럼, 우리의 언어가 조금 더 따뜻하게 바뀌면 어떨까요? 서로를 살리는 언어가 되면 어떨까요? 오늘부터 언어의 온도를 조금씩 올리는 우리가 되는 것은 어떨까요? 말이 바뀌면 인생이 바뀌고, 공동체가 바뀌고, 세상이 바뀝니다.